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,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.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레프 톨스토이 (문단 편집) == 영지 야스나야 폴랴나 == [[파일:external/upload.wikimedia.org/300px-Yasnaya_Polyana_1.jpg]] 러시아에서도 명문 [[귀족]]이었던 톨스토이가 선대로부터 물려받은 영지는 야스나야 폴랴나(Ясная Поляна, '밝은 숲의 빈터')라고 불린다. 모스크바에서 남방 200km 떨어져 있는 [[툴라]] 시의 근교에 있다. 외조부 니콜라이 볼콘스키 공작의 영지로 외동딸이자 톨스토이의 어머니였던 마리야 볼콘스카야가 물려받고 니콜라이 톨스토이와 결혼한 후 이곳에 정착했다. 백작 작위를 가졌던[* 러시아에서 귀족은 작위라기보단 신분인데 적자는 장남은 물론 막내아들까지 다 백작으로 칭할 수 있다. 다만 딸들은 시집을 가면 남편 작위를 따른다. 톨스토이 소설에서 '공작의 영애'로 불리는 경우가 이 경우인데 백작에게 시집가면 백작부인이 된다.] 톨스토이는 장년기 이후 이곳에 정주하며 작품 활동을 했고, 자신의 저택을 이용하여 학교를 만들어 소작농들의 자식을 가르쳤다. 이 저택은 작은 도서관도 딸려 있는데, 장서 수는 2만 권을 넘는다고. 사망한 후에는 이 영지 내의 묘지에 묻혔다. 톨스토이가 사망한 후, 미망인 소피야는 정부에 이곳을 국가가 관리해 줄 것을 차르 [[니콜라이 2세]]에게 청원했으나 거절당했다. 1917년 집권한 공산 정부는 집권한 후 바로 이곳을 사적지로 지정하고 국가가 관리했다. 1919년 소피야가 75세로 세상을 떠나자 이곳의 관리를 톨스토이의 막내딸 알렉산드라에게 맡겼는데, 그녀는 공산 정부가 싫어서 이후 해외로 망명한다. 그러나, 톨스토이는 모두 9남 4녀(다만 이 중 4남 1녀는 어린 나이에 일찍 죽었다)를 얻었을 만큼 자손이 많았으므로 다른 자손들 중 한 명씩을 골라서 관리하도록 했다. 그런데 이후 큰아들 세르게이를 제외한 톨스토이의 자식들은 모두 소련을 떠나 타국으로 망명했다. 큰아들인 세르게이는 작곡가, 둘째 아들인 일리야는 작가, 셋째 아들인 레프도 작가 겸 조각가가 되었다. 알렉산드라는 미국으로 귀화하여 미국에서 톨스토이 재단을 세우고 톨스토이 책자를 냈는데 1979년에 95세라는 장수를 누리고 세상을 떠났다. [[제2차 세계 대전]] 때 이 영지는 [[독일 국방군|독일군]]에게 접수되고 저택은 독일군의 야전병원으로, 그가 남긴 원고들은 독일군의 땔감이 되는 굴욕을 당하기도 한다. 더구나 독일군의 만행은 여기에 그치지 않고 톨스토이 묘지 옆에 전사한 자군 병사들의 무덤을 조성했다. 그 당시 톨스토이의 저택을 접수했던 부대를 지휘한 독일군 지휘관 [[하인츠 구데리안]]은 자서전 《기계화부대장(''Panzer Leader'')》에서 자기는 대문호의 저택에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않았고, 땔감설은 [[소련]]의 모략선전이라고 주장했다. 근데 소련의 선전선동 못지 않게 구데리안의 자서전도 자기 변명이 꽤 많아서 진실은 저 너머에. 어쨌든 [[독소전쟁]]이 끝나고 나서 독일군이 톨스토이의 저택에 저지른 여러 만행들은 모두 원상복구되었고, 오늘날에는 2차 대전 이전의 상태로 보존되어 공개되고 있다. 팬들에게는 성지와도 같은 곳이며, 현재도 톨스토이를 기리며 이곳을 방문~~[[성지순례]]~~하는 사람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고 있다.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-BY-NC-SA 2.0 KR으로 배포하고,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.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.캡챠저장미리보기